필리핀 세부(下), ‘보이는 놀라움과 보이지 않는 충격’

미국을 여행하면서 의외의 물가에 놀라게 되는 두 가지가 휘발유와 스타벅스 커피다. 생각해보면 미국은 전 세계 에너지의 40%를 사용하는 ‘무지막지한’ 소비국이지만, 그만큼의 에너지를 자체 생산하기도 한다. 산유량으로 따지면 최다 생산국이다.


자체 생산하니 기름 값이 싼 걸까. 따지고 들면 복잡해지지만 그렇다고 치자. 스타벅스는 왜 한국보다 가격이 낮은가?
글로벌 기업의 가격 정책을 알바 없지만, 세부의 스타벅스 가격은 단순 환율로 계산해봤을 때 우리나라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이게 말이 되는가.

공항에서 세부시티의 호텔로 향하면서 놀라움은 시작된다. 흑백 사진 속에서만 존재할 것 같은 시가지와 사람들의 모습이 눈앞에서 천연색으로 재현되면 이건 뭔가 싶다.

물론 서울에도 아직 쪽방촌이 있고, 지방엔 다 쓰러져 가는 마을들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어딜 가도 이런 광경은 보지 못할 것 같다. 이 놀라움은 좁은 도로와 먼지, 소음으로 증폭된다. 낡았을 뿐만 아니라 더럽다. 마젤란의 십자가, 산토니뇨 성당 등 관광지 주변이라고 다를 게 없다. 이 영화 같은 풍경이 끝나면 번쩍거리는 호텔이 등장한다. 방금 보았던 잔상이 사라지지도 않은 상태로 전혀 새로운 풍경과 다시 마주친다.

이 황당한 도시에 쇼핑몰은 또 어떤가.
어지간한 도시의 백화점 몇 개를 합쳐 놓은 것 같은 규모다. 아얄라 몰과 SM몰이 그랬다.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 사이로 수십 층의 새로운 건물들이 올라가고 있다. 호텔과 쇼핑몰의 거리는 10여분 남짓이지만 걸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인도는 좁고, 쉴 새 없이 달리는 오토바이와 차들이 쏟아내는 먼지와 매연은 기가 질리게 만든다.

식당을 비롯해서 모든 가게안의 그들은 친절하지만, 길거리 사람들은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이 도시에서 관광객과 현지인은 완벽하게 괴리된다. 언어가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고, 옷차림이 달라서가 아니다. 이곳 쇼핑몰에 취업한 사회 초년생이 받는 월급을 일당으로 나누면 하루 400-500 페소. 스타벅스 커피 한잔이 200페소이니 자기 일당의 절반으로 커피를 마실 수는 없지 않는가.

어느 여행지를 가던지 로컬 음식을 선호하지만, 세부에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기껏 찾아간 곳이 현지 프랜차이즈 음식점이지만, 이조차도 잠시 생각해보면 그들이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가격이 아니다.

어느 여행지를 가던지 로컬 음식을 선호하지만, 세부에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기껏 찾아간 곳이 현지 프랜차이즈 음식점이지만, 이조차도 잠시 생각해보면 그들이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가격이 아니다.

지프니라고 부르는 현지 교통수단은 타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10패소(230원)를 받는 지프니를 타면 앉는 자리가 제한적인 그 차에서 주민들에게 방해가 될게 뻔하기 때문이다. 한번은 길을 잘못 찾아 현지인들이 주거하는 거리를 걸어갔던 적이 있다.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아, 길을 잘못 찾았구나’ 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 모든 것들이 현지 주민들의 행복의 척도를 가늠한다고 볼 순 없을 것이다. 지금보다 덜 잘 먹고 살았지만 어린 시절이 마냥 불행했다고 할 순 없지 않은가. 어쩌면 이렇게 놀란 이유는 혼란에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낡고 더럽다면 받아들이는 속도가 더 빨랐을 것이다.

​하지만 IT파크 같은 특정 구역과 세련된 고층건물들이 일으키는 대비가 더 당황하게 만든다. 이게 다 뭔가 싶다. 발전의 과정보다는 대비의 선명함만 더 깊어질 것 같은 생각은 전혀 근거 없는 우려일 뿐일까. 그래, 그럴 것이다.

3박5일의 짧은 일정으로 한 도시를, 국가를 어떻게 알겠는가, 지난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도 도시 빈민가는 외벽 공사를 통해 노출이 되지 않게 만들었다고 하지 않던가. 발전이 조금 느릴 뿐이고 지금 조금 부족하다고 해서 불행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럴 것이다.

세부시티 로컬에서도 당신이 가진 우울함이 가시지 않는다고? 기분전환도 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나도 모르겠다.
IT파크의 피라미드에서 라이브 음악을 들으면서 칵테일이나 한 잔 하길 권한다. 메뉴는 튀긴 족발과 매운 새우 요리를 추천한다.
마음 내키는 대로 잔뜩 주문해도 상관없다. 계산서를 보는 순간 이곳이 필리핀이라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양혁진 dwhhhj@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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